미국 컬럼비아대 마틴 챌피 교수는 투명한 외피를 지닌 벌레의 신경조직을 검사할 때마다 벌레를 죽이는 연구 방식이 영 불편했다. 한 세미나에서 초록빛 해파리 안에 있는 형광성 단백질에 자외선을 쏘면 초록색을 발산한다는 강연을 듣는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투명한 벌레의 몸 속에 형광성 단백질을 넣으면 자외선으로 단백질의 이동을 추적 관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벌레를 죽이지 않아도 됐다. 요즘엔 형광성 단백질이 다량으로 복제돼서 암 세포 추적과 같은 의학 분야 등에서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챌피는 이 아이디어로 2008년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인공지능(AI) 시대의 총아인HBM(고대역폭메모리) 반도체가 탄생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통찰이 있었다.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는 메모리 반도체의 성능을 높이는 화두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더 작게 만드는 방식은 기술적 한계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반도체에 구멍뚫는 작업을 하고 있는 동료 교수 방에 놀러갔다가 의외의 돌파구를 찾았다. 여러 층으로 쌓은 반도체 속에 구멍을 내고 그 구멍을 통해 전력과 신호를 공급할 수 있겠다는 통찰이다.'3차원 적층 구조' 방식의HBM신화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중국의AI스타트업인 딥시크(DeepSeek)가 지난 27일 애플 앱스토어에서 오픈AI의 챗GPT를 밀어내고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며 전 세계AI업계에 충격을 줬다. 일부 성능 테스트에서는 오픈AI가 지난해 9월 출시한AI모델 'o1'을 앞질렀다고 한다. 딥시크는 자사AI모델에 엔비디아의 저사양 칩을 장착했고 개발비는 557만6000달러(약 80억원)였다고 밝혔다. 이게 사실이라면 메타의AI모델인 '라마3' 개발 비용의 10분 1 수준이다. 미국 내에서는 "AI의 스푸트니크와 같은 순간"이라는 말이 나온다. 미국 기술주들의 주가가 줄줄이 하락한 것은 이런 딥시크의 잠재력 때문이다.
창업자 량원펑(梁文鋒)은 27일 '더 차이나 아카데미'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이런 혁신이 가능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한 젊은 연구원이 기존 방식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대안(代案)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며 "혁신은 무엇보다 신념의 문제로 자신감이 필요하고 그런 면에서 젊은 사람들이 해내기 쉽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투자가 반드시 더 많은 혁신을 낳는 것은 아니다"고도 했다. 한 연구원의 통찰과 팀원들의 혁신 노력이 미국 주도AI판도를 흔들었다. 딥시크의 사례는 미국 빅테크들의 천문학적AI투자에 지레 위축됐던 한국AI개발 기업들에게도 시사점을 던진다.
헌법 수호 약속한 尹의 계엄 선포 국민 신뢰 배반한 시대착오 조치 법치 따르지 않고 분열의 길 가면 나폴레옹 3세 같은 오명 남길 것
그는 대통령으로 남았으면 역사의 평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몇 가지 우연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덕분에 대통령이 된 그는 재임 기간 의회와 불화했다. 거대 야당은 사사건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의회 내 지지 세력은 소수여서 국정은 비틀거렸다. 대통령과 의회는 둘 다 국민에 의해 선출됐다는 정통성을 내세우며 충돌하곤 했다. 정치권은 좌우로 나뉘어 정쟁에만 몰두했다. 국민의 삶은 어려워졌고 정치는 환멸을 키웠다. 소수파 대통령은 군대와 경찰 수뇌부를 심복으로 교체하고 은밀히 포고문과 체포 인사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 와중에 의회가 밀어붙인 법안 하나가 태풍의 눈을 만들었다. 유권자의 투표 자격을 제한하는 내용의 선거법 개정안이었다. 그는 자격 제한을 없애는 법안을 의회에 요구하며 덫을 놨다. 의회가 거부하자 대통령은 거사를 결행했다. 1851년 12월 2일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프랑스 제2공화국 루이 나폴레옹 대통령 얘기다.
200년 가까운 시대적 격차에도 루이 나폴레옹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기도는 정치적 맥락이나 준비 과정이 흡사하다. 결과는 사뭇 달랐는데 두 사람의 정치 수준이 성공과 실패를 갈랐다. ‘보통선거 부활’을 내건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는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정치활동을 금지’한 윤 대통령의 시도는 거센 저항을 불렀다. 카를 마르크스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과 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비교하면서 “모든 세계사적 대사건이나 대인물은 두 번 등장하는데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소극(笑劇)”이라고 내렸던 평가는 그를 지나치게 평가절하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진보적 사상인 국민 주권의 공화주의를 표방했던 인물이었다. 쿠데타 찬반도,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되기 위한 결의안도 국민투표에 부쳤다.
그에 비하면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행위는 시대착오적 퇴행이었다. 건국 이래 쿠데타 세력의 헌법 침탈이 몇 차례 있었지만 ‘1987년 체제’ 이후로 우리 국민은 ‘국민 주권’과 ‘삼권 분립’의 헌법 원칙이 위협받을 일은 없을 것이란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다. ‘헌법 준수’를 선서하고 취임한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무장 군인을 국회에 투입하며 입법부 장악을 시도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대통령이 적법한 체포영장 집행에 불응하며 관저를 요새화하고 중세의 왕처럼 공성전(攻城戰) 태세를 갖추는 시나리오는 드라마 작가에게조차 초현실적이었을 것이다. 15일 체포된 윤 대통령은 이송 직전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체계를 수호해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불법적이고 무효인 절차에 응하는 것은 아니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선뜻 호응하기 어렵다. 계엄이 선포된 밤, 무장 군인들이 국회의사당 창문을 깨고 본청에 난입하는 그 순간 헌법 수호자로서의 대통령 지위는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됐다. 윤 대통령이 지키겠다는 헌법과 법체계는 무엇인가.
윤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계엄 포고령)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면, 그 결단이 진심이라면 이제라도 법치에 따르고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그 길만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이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져 갈등하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수사나 재판 절차를 놓고 구구절절 따지는 것은 변호인에게 맡기고 대통령은 대통령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열 대신 통합을 말해야 한다. “유튜브를 통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 같은 정파적 발언을 넘어서야 한다.
나폴레옹 3세에게 ‘괴제(怪帝)’라는 멸칭이 붙은 데는 빅토르 위고를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과의 불화나 흥청망청한 연회 정치 등도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어이없는 몰락 방식이 결정적이었다.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참전한 그는 황비의 주제넘은 개입 등으로 졸전을 펼치다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는 황제답게 행동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명예는 실추됐다.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인 국민은 그를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공화정을 선포했다. 난데없는 계엄·탄핵 사태로 우리 국민은 참담한 심경이다.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윤 대통령은 이제 대통령답게 행동하고 말해야 한다.
‘나를 죽여야 국가원수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노무현정부의 대통령 경호실이 2006년 8월 발간한 책자 ‘바람소리도 놓치지 않는다’에는 대통령 경호원들의 사생관이 담겨 있다. ‘매일 아침 목욕을 단정히 하고 빗질을 가지런히 하고 속옷을 깨끗하게 갈아입는 것은 최악의 경우 깨끗한 모습으로 내 시신이 수습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대목에선 숙연해진다.
군인이나 경찰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무술을 연마하지만, 경호 훈련의 최우선 목적은 대통령 보호다. 대통령을 겨냥한 테러 위험이 감지됐을 때 반격하기에 앞서 자신의 몸을 대통령의 방패로 만드는 훈련을 반복한다. 지난해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를 암살하려는 총탄이 날아왔을 때 비밀경호국 소속 요원들이 반사적으로 트럼프를 에워싸도록 한 그 훈련이다. 경호 훈련을 ‘죽는 훈련’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경호원 가족들은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폭탄을 덮치거나 총칼을 막아내는 경호 시범 훈련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체포영장 집행에 불응하면서 대통령 경호처 소속 경호원들이 기로에 섰다.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과 경호원의 직업적 소명이라는 상반된 가치가 충돌하는 공간에 갇혀 힘든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이들은 ‘대통령 경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원수의 절대 안전으로 이는 대통령 경호처의 존재 가치’라는 복무 수칙에 따라 윤 대통령 수호를 위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체포영장 1차 집행에 실패한 공수처는 조만간 다시 윤 대통령 체포에 나설 태세다. 경호원들은 자칫 국가원수 경호의 최후 보루라는 명예와 긍지 대신 ‘대통령의 사병’이라는 불명예와 조롱을 뒤집어쓸 수 있는 상황에 놓였다.
16세기 신성로마제국 군대가 로마를 공격했을 때 교황청이 고용한 스위스 근위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교황에 대한 ‘충성서약’을 끝까지 지키다 옥쇄했다. 이들의 희생은 스위스 용병의 충성심을 담보하는 신뢰 자산으로 남아 훗날 교황청이 스위스 근위대만 고용하는 관행을 만들어냈다. 윤 대통령에게 충성한 경호원들에게는 어떤 보상이 있나.
조남규 논설위원
*2025년 새해 벽두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에 나섰다. 1차 시도에 실패하자 영장을 재발부받아 2차 집행에 나설 태세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 대통령 경호실에서 '바람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는 경호실 소개 책자를 냈다. 경호실이 자신들의 속 모습을 공개한 것은 처음이었다.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정부의 경호실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친분을 맺었던 경호원들이 떠올라 그들의 입장에서 써봤다.
도하 종합 언론사들은 대체로 토요일에 쉰다. 일요일자 신문을 발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 년에 313일 정도 발행하는 셈이다. 위 사진의 지면처럼 11242호라면 36년 정도 발행한 신문이 된다. 창간호가 1호이니 창간 36주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신문이다.
그런데 신문을 만들지 않는 토요일에도 특급 대형 사건, 사고가 발생한다. 이럴 때는 토요일에도 4면 정도 신문을 만들어서 길거리나 지하철역, 군중이 모인 집회장 등에 살포한다. 정식으로 발행하지 않기 때문에 신문 발행 번호도 붙이지 않는다. 이 때 발행하는 신문을 기존 호수외에 별도로 만든 신문이라고 해서 '호외( 號外)'로 부른다.
개인적으로 입사 이후 두번의 호외가 발행됐다. 한번은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 자살을 했을 때다. 이 때는 워싱턴 특파원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호외 발행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그리고 2024년 12월 14일 국회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을 때다. 이번 호외는 편집국장으로서 지면 제작을 총괄했다.
그날 밤. 동료들과 저녁 식사를 하다가,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45년만에 계엄이 선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출입처로, 회사로 내달렸다. 그렇게 국회, 대통령실, 국방부 등지에서 계엄선포 이후 혼돈의 상황이 독자·시청자에게 생생히 전달됐다. 계엄이 선포된 3일 밤부터 계엄이 해제된 다음 날 새벽까지 기자들은 무엇을 보았고, 어떤 경험을 했을까. 어느 때보다 긴박하게 돌아갔던 취재 현장, 뉴스룸의 계엄 그날 밤을 재구성했다.
◇3일 오후 10시20분 서울 여의도 국회 조성봉 뉴시스 사진기자, 공병선 아시아경제 기자는 계엄선포 직후 비교적 초반부터 국회로 들어갈 수 있었다. 10시20분쯤 국회 인근에서 ‘꾸미’ 기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공병선 기자는 동료들과 스마트폰으로 대통령 긴급담화 생중계를 지켜봤다.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대통령의 말이 나오는 순간, 저녁 자리를 파했다. 집으로 가려다 공 기자는 국회 반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상황이 되면 가보라’는 말을 듣고선 곧장 국회로 발걸음을 돌렸다. “국회 출입 기자니까, 관성대로 국회를 간 것도 있다.” 이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조성봉 기자는 ‘성봉아 계엄이다’라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윤 대통령이 ‘반국가세력들을 척결해야 되고…’ 발언을 하는 순간, “머리도 감지 않고, 여하튼 바로 총알택시를 탔다.” 18분 만에 국회에 도착했다. 오후 10시45분~50분 두 기자가 경찰 기동대에 의해 가로막힌 국회 정문 앞에 도착한 시각이다.
◇3일 오후 9시20분 서울 용산 대통령실 그에 앞서 이날 오후 9시20분쯤부터 대통령실 기자들 사이에선 이미 윤석열 대통령이 중대 발표를 한다는 설이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슨 내용으로 왜 발표를 하는지는 대통령실 참모들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오후 9시50분경 방송사들에 담화 내용을 알리지도 않은 채 생중계 연결을 바란다는 메시지만 공유됐다.
윤 대통령이 긴급담화를 진행하는 순간까지도 대통령실에선 출입기자들에게 아무런 예고가 없었다. 당시 대통령실에 있었던 김태영 JTBC 기자는 4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전날 밤 상황에 대해 “혼돈 그 자체”였다고 전했다. 당시 김 기자는 핵심 참모 중 한 명과 식사 중이었는데 이 참모 역시 그제야 서둘러 대통령실로 돌아갈 정도였다. 김 기자는 “저를 비롯한 상당수 기자들이 대통령실로 하나둘 복귀했고, 얼마 안 돼 경호처에서 출입을 막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10시23분, 결국 담화가 시작됐고 기자들도 방송을 보고서야 내용을 알게 됐다.
◇“용산 출입기자가 뭔가 이상하다 한다”… 계엄 전후 비상 걸린 언론사 뉴스룸 비상계엄 선포 직후 각 언론사 편집국, 보도국 분위기도 급박하게 흘러갔다. 박범수 MBC 보도국장은 집으로 돌아온 직후인 오후 10시40분쯤 야근 당직자로부터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무조건 밤샘 특보 준비, 부국장·부서장·팀장 전원 복귀” 지시를 내린 박 국장은 곧장 회사로 들어갔다. “MBC가 제1 타깃이 될 가능성이 컸다. 언론사 봉쇄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전에 일단 빨리 들어가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박 국장은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다음은 사건을 정확히 규정하는 것”이라며 “이번 사건은 내란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기계적 중립이나 양비론을 제시해선 절대 안 된다고, 불법적인 내란 행위라는 규정하에 특보나 뉴스를 내보내게 했다”고 말했다.
지면 강판 연기, 호외 제작으로 신문사 편집국도 밤을 지새웠다. 조남규 세계일보 편집국장은 오후 9시50분쯤 정치부장을 통해 ‘용산 출입기자가 뭔가 이상하다고 한다, 대통령실이 방송사에 생중계 요청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곧바로 정치부 기자들 전부 현장 복귀를 지시했고, 조 국장 본인도 담화 내용을 듣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조 국장은 “비상계엄이라는 뜬금없는 발표가 나왔다. 그다음부터는 정신이 없었다”며 “저희 같은 경우 5판(초판) 마감이 당초 10시30분까지다. 윤전기를 세울 수도 있겠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5판 마감을 뒤로 미뤄 최종적으로 다음 날 오전 1시에 강판을 했다”고 말했다.
◇계엄군 본회의장 앞까지 진입, 군 국방부 기자단 퇴출… 위험한 상황 계속된 취재현장 다시 여의도. 시민들과 함께 몸싸움해가며, 경찰에게 따져가며 겨우 국회 정문을 통과한 조성봉, 공병선 기자는 곧바로 헬기 소리를 들었다. 오후 11시께, 두 기자는 국회 본청 뒤 운동장에 착륙한 헬기에서 공수부대가 내리는 모습을 가장 충격적인 장면으로 꼽았다. 군이 진입하기 전 국회 직원, 보좌진들이 국회 본청에 있는 의자나 책상을 뜯어서 문을 막는 모습, 계엄군과 보좌진의 격렬한 몸싸움도 눈앞에서 봤다. 정말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 기자는 “헬기가 날아오는 모습을 보고 운동장으로 뛰어가려다 공수부대가 본회의장을 점거할 거 같아 일단 안으로 들어왔다. 먼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당 대표실 쪽에 있다가 예결위장으로 몸을 피신하려고 허겁지겁 가는 모습을 봤다”며 “계엄군을 처음 보니 어떤 두려움을 순간 느끼긴 했는데 저희 팀원 중엔 제가 처음 온 상황이라 일단은 찍어야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 사이 국방부 기자실에서도 위험한 상황이 일어났다. 권혁철 한겨레 기자가 6일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전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3일 밤 11시20분께 전투복 차림의 군사경찰이 갑자기 기자실에 들어와 ‘국방부 청사 내부에 있는 민간인들은 모두 나가야 하니 기자들도 나가라’고 말했다. ‘안 나가면 테이저건(전기 충격용 권총)을 쏠 수도 있다’고 경고도 했다. 권 기자는 “이러다 테이저건에 맞거나 포승줄에 묶여 끌려나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들었다”고 전했다. 다행히 밤 11시50분쯤 장교 한 명이 ‘기자실까지는 민간인 출입을 허용한다’고 말을 바꾸며 위험한 상황은 일단락됐다.
4일 0시30분에서 1시 사이. 비상계엄 해제요구안 의결 직전 국회 본회의장 안에 있던 공 기자는 문밖에서 거칠게 대치하는 소리,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며 ‘아 결국 군이 들어오는 건가’라는 어떤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결국 이날 새벽 1시1분, 계엄선포 직후 150분여 만에 비상계엄 해제요구안이 통과됐다. 공 기자는 “이날 다들 몸 안 사리고 기자들은 기자 역할을 했고, 보좌진, 국회의원들도 그 역할을 다 했다”며 “각자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게 어떤 건지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회상했다.